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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디의 역사 이야기#1 신교도들의 전차, 보헤미안 워 왜건

전차장 여러분,

전장에 흐르는 긴장감만큼 전쟁 중에는 흥미진진한 사건이 많이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외부 역사 전문 블로거 가우디가 여러분께 생생한 역사 이야기를 전해줄 것입니다.
잘 알려진 사건부터 와전된 일화까지, 앞으로 가우디가 소개할 역사 이야기에 대해 많은 기대 바랍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전차의 탄생 과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전차(Tank)는 대표적인 공격무기입니다. 물론 방어목적으로 쓰일 때도 있지만 전차는 대체로 방어선을 뚫고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적군이 대전차 화기를 가지고 있거나 항공지원을 받는 상황만 아니라면 영화 퓨리(Fury)처럼 전차 한 대가 중대 병력을 상대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죠.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초장에 거둔 승리들이 전차를 활용한 전격전의 성과물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차만큼 가성비가 높은 무기도 드물 것입니다.

 

전차는 1차 세계대전 중에 출현했습니다.
참호 속에 들어앉아 무인지대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에
총탄을 박아넣던 전선의 분위기는 전차의 등장으로 급반전됐습니다.
총알 따윈 가볍게 튕겨버리고 철조망도 거침없이 타고넘는
쇳덩어리가 나타나면서 참호전은 사라졌습니다.
비록 초기 버전은 잔 고장도 많고 성능도 부족했지만
각국 정부가 무기개발에 경쟁적으로 돌입하면서
개선된 전차는 보병들의 천적으로 등극했습니다.

 

 

 


 

전차는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의견은 분분합니다. 현대 잠수함의 모태가 된 남북전쟁 당시의 북군 철갑선 모니터호처럼 분명 모티브가 있을 테지만 정설로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주장과 추측만 난무할 뿐입니다.
그나마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케치입니다.
좌측 그림을 한 번쯤은 보았을 것입니다. 구조를 보면 현대의 전차와 유사하긴 하지만 이것을 전차의 직계 조상으로 보기엔 무리가 많죠.

여러 개의 대포가 탑재되고 두꺼운 목재로 둘러싸인 이 디자인은 무게도 엄청나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살던 시절 대부분의 운송수단이 사람과 말의 근육에 의지해 이동하던 것을 감안하면 쓸데없이 거대한 이것을 이끌고 전장을 누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상상일 것입니다.
제작된 바도 없지만 만들어졌대도 사실상 실용성이 없는 컨셉 무기 정도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케치 대신 실제 전차의 원형으로 인정할만한 것은 보헤미아, 지금의 체코에서 출현한 워 왜건(War Wagon)입니다. 이름 그대로 전투용 마차죠.

구조와 사용법을 들여다보면 현대의 전차와 많이 비슷합니다. 전차처럼 덮개가 있었고 무장한 병사들이 내부에 탑승하며 구멍을 통해 외부의 적을 공격하도록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말이 뒤에서 밀면서 적진으로 돌격하는 기능까지 갖춘 워 왜건(War Wagon)은 기병을 상대로 한 방어용 무기이자 공격용 무기의 특징을 모두 겸비했고 실제 여러 전투에서 성능을 입증한 실전 무기입니다.

  

  워 왜건은 유럽에 종교전쟁의 불씨가 잉태되던 1400년대 초에 등장했습니다.
1419년 보헤미아(체코) 지역에서 가톨릭 교회의 부패를 참다못한 농민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종교개혁을 부르짖은 사제 후스(Huss)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이들을 후스파(Hussite)라 불렀죠. 후스파 신교도들은 로마 가톨릭에 대항해 종교개혁을 요구했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조직했습니다. 당연히 로마 가톨릭은 이들을 이교도로 매도하고 독일, 폴란드, 헝가리 지역의 가톨릭 군대를 모아 진압에 나섰습니다.
종교적 신념을 제외하면 화력과 병력 면에서 게임도 안 되는 전력을 지닌 후스파의 패배는 불 보듯 뻔했습니다. 종교적 신념에 앞서 자신의 생명부터 지키려면 후스파에겐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당시 군대의 핵심전력은 중무장한 기사들로 구성된 기병들이었습니다. 갑옷을 갖춰 입고 무서운 기세로 돌진하는 기사 군단을 삽과 곡괭이, 창 따위로 무장한 농민병들이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전투가 시작되면 무장한 기사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겁을 먹고 줄행랑칠 것이 뻔했습니다. 이런 고민 속에서 후스파가 개발한 신무기가 바로 워 왜건입니다.

 

   


주변에 널린 마차를 개조해 덮개를 씌우고 덮개 중간에 구멍을 뚫어 안에서 밖을 향해 석궁과 화기를 쏠 수 있게 설계했습니다. 상황이 불리해지면 마차 뚜껑을 덮어 엄폐할 수도 있었고 이동할 수도 있었으며 여차하면 기습적으로 쏟아져 나와 역습을 벌일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말 탄 기사와 대등한 높이에서 교전을 벌일 수도 있었습니다. 마차 안에는 무기가 떨어질 경우를 대비해 돌멩이까지 비축해 두었죠.

워 왜건 한 대당 대략 16명 이상의 병사들이 배치됐습니다. 그들은 지금의 전차 승무원처럼 분업화되어 있었습니다. 운전병 2명, 방패병 2명, 석궁 사수 4명, 머스켓 소총수 2명, 창병 6명을 태운 워 왜건을 원형 혹은 사각형으로 이어붙여 방어선을 구축했고 진의 중앙에는 후스파 군대의 주력인 농민병들을 대기시켰습니다. 

전투가 시작되고 중무장한 기사들이 몰려들면 전열의 선두에 선 워 왜건이 동시에 머스켓과 석궁을 발사해 적의 선두대열을 쓰러뜨렸습니다. 갑옷을 입은 기사보다 말을 겨냥해서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말에서 떨어진 기사들은 갑옷의 무게 때문에 전혀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않았습니다. 워 왜건이 구축한 방어선 앞에서 적의 기병과 보병들이 한데 뒤엉켜 갈팡질팡할 때쯤 뒤에서 대기하던 보병들이 일제히 쏟아져나오면서 적을 밀어붙이는 전술을 펼쳤습니다. 동시에 그간 방어대형으로 배치되어있던 워 왜건들도 일제히 적진을 향해 진격하며 남아있는 모든 화력을 쏟아냈습니다. 워 왜건은 후스파에게 바리케이트이자 장갑차였고 전차이자 병력 수송까지 1인 4역을 수행해냈습니다.
 

총 다섯 번에 걸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지만 워 왜건을 전술적으로 활용한 후스파는 단 한 차례도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압도적인 화력과 병력에도 불구하고 승기를 잡지 못한 가톨릭 군대는 결국 후스파와 평화협정을 체결하며 보헤미아 왕국에서 신교도들의 지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보헤미아에서 자리 잡게 된 신교도 세력들은 이후 서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전 유럽을 휩쓴 종교전쟁의 서막을 올리게 됩니다.

보헤미아에서 가치를 톡톡히 입증한 워 왜건은 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린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유럽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도 명성을 입증했습니다. 자신들의 적군이었던 후스파에게서 배운 대로 워 왜건을 활용한 헝가리 제국군은 이슬람 군대의 진격을 효율적으로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워 왜건이 지녔던 전략적 가치가 다른 전쟁에서도 통했던 것입니다.

 

 

워 왜건은 대포의 화력이 강해지면서 방어력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났고 전선에서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가톨릭 군대 앞에서, 그리고 이슬람 군대 앞에서 신앙의 자유를 지켜준 워 왜건을 잊지 않았습니다.

500년이 지난 후 전차라는 이름으로 이 무기를 부활시켰던 것이죠.

 

 

 

글: 가우디 (외부 역사 전문 블로거)

사진 출처: 가우디,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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